다섯째 재앙 – 가축의 죽음

한양떼 교회, 20211226, 주일 오전 예배 설교

9:1~7

다섯째 재앙 가축의 죽음

 

사람들의 생각들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적 변화에 놀라고 그것에 대하여서 실존적 고민을 하는 가운데서 사유의 방향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기적인 전쟁의 때나 기근의 때나 어떤 재난의 때에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의 인식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의 방향을 이끌어 왔고,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것의 해석은 이후에 또한 반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서 소유의 종말이라는 미국 저자의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소유라는 시대는 가고 가치의 시대라고 함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적 실존의 고민과는 다른 것이지만 소유와 빈곤의 개념은 또 다른 생각을 가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소유에 대한 관심과 해석은 구약 성경에서도 언급되어지고 있고 형제 살인(4:8~12)과 같은 것이 자기의 소유와 그 가치 이해를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바르게 가지지 못하는 자로서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봅니다.(4:5) 이후에 불의한 재물과 친구에 대한 것(16:9)도 신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가축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다섯 번째 재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들어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만일 보내기 거절하고 잡아두면 가축들에게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을 또한 말하게 하셨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기한은 정하셔서 앞서 말씀하신 것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가 그것을 확인하고도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들 중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앞서 있었던 재앙에서 죽는 사람들도 의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표현하시지 않았는데, 이번 재앙에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1. ‘내 백성을 보내라’, 2. ‘가축을 구별하리니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내 백성을 보내라

 

이렇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서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이는 히브리인이란 말은 이브르라는 자음으로 이루어진 말로 이라는 말과 또한 넘어가다 건너가다란 뜻을 가진 말들과 어원을 같이 말합니다.

 

그래서 종이란 말씀에서는 내 백성이라고 표현하심과 같이 이스라엘을 그의 소유적 개념으로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넘어 가다 건너가다라는 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세 번째 재앙에서 구별이 있었듯이 이집트인들과는 분명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시겠다는 것과 데려가심에 대한 정당하심에 얼굴을 붉히지 못하도록 말씀하심을 읽게 됩니다.

 

말씀하시는 이가 여호와이심으로 그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심에 대한 것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를 통해 완악해질 애굽의 바로의 모습은 예정되어진 것이지만, 그 주체로서 여호와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그 일반적 입장에서 깨닫도록 말씀하심이 두 번째 주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 ‘가축을 구별하리니

 

가축은 이스라엘에게나 애굽 사람들에게나 소유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쪽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구별되는데 그 결과는 가축의 죽음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축은 살아 있으면서, 그들의 재산이면서 또한 하나님께 드릴 것으로서의 구별되어진 것과 애굽 사람들의 가축은 이미 부정되어져서 죽은 것으로서 그들의 버려진 재산이며 또한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으로서 구별되어진 것입니다.

 

6절과 7절에서 이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음과 이스라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음, 바로가 진정 깨닫지 못한 엄청난 후폭풍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유의 불균등은 애굽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된 가축들을 불의하게 착취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7:20)

 

하나님께서 드려질 것으로서 구별되어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게 한 소유로서의 가축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애굽 사람들이 이제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자신들의 삶을 위해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로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축에 손을 대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은 함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중심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하여도, 이제는 전혀 그것이 인정되어지지 않은 자들로서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존재의 재앙이며 또한 본질적 심판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입니다. 레위기서의 말씀은 이때에 기록되지 않았고 그에 따른 판단에서 볼 때에 시대착오적인 적용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제사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필요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형성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담 언약’(6:7)이라는 표현을 이후에도 우리 보다 앞서 읽고 있는 호세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4:3~7)에서의 그 형식도 언약에 따른 것과 그 판단임을 읽을 수 있을 때에, 성문화 시점으로서의 율법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오히려 드릴 수 없는 제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버려졌음에 대한 것이 현실화되어졌음으로 인해’, 동생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인(Cain = "possession")은 그 이름이 소유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에 있어서, 소유에 어떤 빙의적 개념, 악신에 따른 자로서 하나님의 소유되지 못한 자의 슬픔인 것입니다.

 

이처럼 소유에 집착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의 강요에 잡히게 된 것이 바로 애굽 사람들의 상황이 되었고, 그들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 대한 흐려질 만큼 흐려진 그것마저도 온전히 지워지는 자기 백성에서 끊어짐에 대한 현실적인 상황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엄청난 재앙인 것입니다.

 

바로는 이런 것을 전혀 몰랐을까?’라는 질문에, ‘아니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었듯이, 바로도 그만한 이해를 했음이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악함이라고 함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2:8)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졌다고 하는 것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아니라, 그 얼마나 악하게 마음이 강퍅해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자본주의적 개념에 대한 비판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논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부자의 개념으로 그 소유의 많음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12:20~21)에서, 그 본문의 관심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께 드려지고 또한 그들의 삶을 위해 주어진 구별되어진 소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말함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 주의 사랑 느낄 때, 주의 영광 내게 비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또한 주의 뜻을 따르게 하심의 믿음을 받게 되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 성도를 구별하시고 그의 소유를 구별하시는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 찾으시는, 주의 받으신 바 된 성도의 오늘날 모습은 바로 주의 주시는 믿음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기억하며,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도들의 거룩함에 대한 중심을 바르게 받아서 성도로서 거룩한 길 가는, 주의 구원의 길에 서는 그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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