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난 의

한양떼 교회, 20211215, 수요 기도회 설교

3:4~9

하나님께로 난 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상황에 대해 적응하고 서로 합의와 타협을 통해서 생활해 나갑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런 것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대적 기준을 말할 수도 있지만, 특히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고 나타내실 때에는 그것이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절대적 판단과 따름이 귀하고 옳은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적이란 말은 어떤 고집 센 편협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잡혀가서 옥중에 있지만 교계의 지도자로서 로마의 회유와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로마에서 적지 않은 배상을 해 줄 수도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배설물로 취급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난 의를 의지하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거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살펴 증거하며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기도 육체를 신뢰할 만함에 대한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팔일 만에 할례,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 바리새인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 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경제용어로써 표현하면, 기회비용으로써 모든 것은 그 가치가 배설물에 지나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1.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2.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빌립보 교회를 세웠는데, 그 때에 있었던 일 중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쳤습니다.(14:19) 그런 사건을 볼 때에 유대교에서도 사도 바울을 아주 비천하고 볼품없는 자이고 또 그래서 그가 전하는 복음도 이상한 것처럼 매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로 보아도 결코 육체를 신뢰할 수 있는 자로서 그들보다 더 유대교를 잘 믿고 섬겨왔으며 그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고 음해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들도 인정해야 할 중심과 바른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함으로서 사도 바울이 내쳐진 이유가 유대교의 이상한 사람으로 그가 말하는 복음도 이상하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처럼 유대교적인 가르침보다도 더 고상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손할례당이라고 표현 한 것과 같이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사람의 몸에 있게 하는 것으로 선택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의무를 지킴에서 분리되어진 구별적 거룩의 의를 생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 자체에 개개인적으로 그 증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여자의 후손(3:15)으로 오실 메시아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 의미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할례의 가르치는 최종적 증거이며, 또한 가장 고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곧 할례파’(3: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더욱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은 이방인들에게도 현실적인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는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이제 로마의 감옥에 있는 만큼, 로마가 우월하고 로마 군인의 특성화되어진 빌립보 지역의 주도권과 통치권이라고 함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 쉽게 말해, 최고의 장수가 잡히면 그 전쟁은 끝난 것과 같이 교회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로마의 속국의 정치적 한 부분에 예속되는 것으로 그것에서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과 사회적 여론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또한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 고통처럼 실패한 신앙이라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없는 것으로 왜곡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사도 바울을 회유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를 정치적으로 박해와 예속화하는 것으로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도 자연스러운 로비로서의 많은 것이 제안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배설물로서 일축하고 있는 부분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승리는 끝난 것이 아니며 사도 바울이 구속되어 있다고 하는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부귀영광과 종교적 히브리적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에 의로움이 비로소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그 가르침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의 하나님의 의가 가장 고상하고, 인간의 본래성에 해당되어지기 때문에, 자신은 그 모든 유혹을 버릴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기독교를 판단하고, 특히 말씀이 주의 종된 자도자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오해의 소지라고 하는 것을 진정한 부패로서 또는 자기들의 위치를 위한 것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은 신앙적으로 큰 핍박으로 나타나고 성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하신 가운데서 그 신실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것이 성도에게는 물론이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시는 뜻하심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의 현실적인 판단만 본다면, 모든 것이 끝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귀한 모습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에서 비로소 의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적으로 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의 그 이름을 증거하신 주님은 그 의의 구주가 되셔서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지극히 고상한 것입니다.

 

현실적 측면에 대한 해석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주님의 뜻하심에서 바른 판단으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의지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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