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한양떼 교회, 202236, 주일 오전 예배 설교

11:1~10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어떤 과정에서 요긴한 과정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마치 밥을 지을 때 뜸을 들여야 밥이 잘 된 것과 같이, 뜸은 바쁘면 생략할 수도 있겠지만, 꼭 챙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을 다 마치기 전에 무언가를 꼭 해야 하는 그래서 그 일을 다 마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과 본격적인 심판을 이루시기 전에, 여러 준비시키시는 은혜를 봅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주권적 역사임을 기억할 때, 그 은혜를, ‘주의 구원받은 자들의 받는 은혜 베푸심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지막 재앙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되어질 일, 즉 그들이 다 쫓아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하시고, 모세는 애굽 사람들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른 여호와의 말씀이,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여호와께서 들어가심으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 ‘바로의 장자로부터 몸종의 장자, 가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을 것을 말씀하시고 애굽의 큰 부르짖음이 있을 것을,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 한 마리도 그런 해를 당하고 그런 부르짖음이 없음을 인해 여호와께서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백성사이를 구별하심을 알 것과 왕과 신하가 절하며 나가라 한 후에 나갈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바로에게서 모세가 나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이제 주의 기적을 더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바로가 완악하게 되어 보내지 않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16:19-31)과 비교되어 해석되어짐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16:25)

 

 

 

앞서 본, 첫째 단락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웃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고 은혜를 입었음과 모세는 애굽의 바로와 신하와 백성의 눈에 위대하게 보였음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어떤 사람’(박윤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쫓겨나는 자의 모습이 아니고 승리한 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그런데 더 질문되어질 것은 모세는 위대하게 보였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질문되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 모습인데(16:15)...

 

여기에 대한 것은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음이 답변되어집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의 구원받은 자로서의 위로라고 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 위로를 받게 하시고, 이것은 천국에 들어간 나사로와 같은 은혜를 말하게 됩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은 나사로의 고난에 비교되어질 정도로 착취를 당하고 사람의 인권이라고 함이 없는 노예의 생활로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표현하듯이, ‘여호와께서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심’(4)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서 있었던 흑암의 재앙의 내용적 연결을 의미하심을 봅니다. 물론 흑암의 재앙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의 현실적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실제적 연결을 전제로 하심을 봅니다.

 

그런데 이미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흑암 재앙은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심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심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어지는 전제로서 죽음 이후의 성도들의 모습을, 살아서 현실적 구원의 증거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으로 증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생명이 있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위로나사로와 같은 의미에서 받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주께서 주시는 은혜로서의 당위성에서 모세의 위대하게 보임도 어떤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분노를 자신의 분노로 나타낸 모세(8)에게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지적하시며 기적을 더하시리라는 주의 뜻을 말씀하심(9)으로 그에게 위로하심도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의 감정을 달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이 그에게 위로가 된 것입니다.

 

둘째 단락(4~8)에서는 이미 밤중에 애굽 가운데 들어가심에 대해 말씀드림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좀더 분명한 것은 주의 구원하심과 주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2. 즉 죄로 죽음이 들어온 세상(5:12~13)에 자기 백성들을 위해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12:46)을 봅니다. 빛이 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둠의 모습들, 그들이 여전히 밤을 어둠을 일상으로 생활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생명이 없는, 즉 빛이 없는 자들’(1:4 참고)이 그 기업이 되는 장자의 죽음을 인해서 처절한 존재적 부정으로서의 심판이 이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아홉째 재앙 설교원고 참고)

 

그렇지만,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자들로서 그들에게는 생명의 빛이 있으므로 그런 심판으로 인한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님과, 그런 구분에 따른 구별은 구약적 언어의 카도쉬거룩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의 구원거룩을 나타내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이런 가운데 정치적으로, 이제 얼굴을 보기 거절한 바로의 모습의 입장에 따라, 주의 말씀을 받지 않기로 한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가운데서, 모세의 분노가 있지만, 주의 뜻하심으로 되어짐의 말씀하심으로, 그를 치유하시고 위로를 받게 하심을 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의 은혜로 사람들에게서도 은혜를 입게 하심과 또는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주의 날이 이루기전까지는 여전히 부당함과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고난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이 또한 주의 구원하심의 정하신 뜻하심을 깨달아 우리 자신을 성도로서의 믿음의 삶을 여미는, 경건의 자리에서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베드로의 권면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주의 믿는 성도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을 감사 찬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애굽에 내리시는 마지막 재앙, 심판을 앞둔 가운데서 준비시키시는 주의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귀하고 또 앞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필요한 것들을 얻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됨을 봅니다.

 

때로는 어떤 부당한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기억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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