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다
한양떼 교회, 2022년 4월 17일, 부활주일 오전 예배 설교
마 28:1~10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다
일상에서 어떤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서, 맞게 되는 당혹감에 대하여서 난처해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는 지혜롭게 상황과 사태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전화위복이라는 개념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고 긍정할 수 있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 그런 경우는 많이 피곤하고,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경우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절대자와의 만남에서는 여지를 비로소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천사의 증거를 통한 주의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를 받으며 또한 주님을 만난 자로서의 기쁨과 사실로서 감사드리는 자리에 서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는데,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았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과 여자들이 그 광경을 보았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가 여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 것을 안다고 하며,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음과 그에 대한 증거를 보라고 함과 주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에서 뵐 것이라고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하니 예수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형제들로 갈릴리로 가라고 하라 하시면서 거기서 주님 자신을 뵙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1. ‘천사의 증거’, 2. ‘무덤을 지키는 자와 여자들’, 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천사의 증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롬 9:29) 만군이란 말은 ‘전능(Almighty)’ 또는 ‘군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든 천사들의 주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천사는 주의 부리시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 말씀에서는,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음’과 그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았음’(2절)에 대한 것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부활의 증거가 역사적 사실로서의 확고성을 가짐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참고 : 고고학적 개념으로서의 ‘역사화’하게 되어질 앞으로의 역사관에 대하여서, 그것의 주재권이 세상에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보내심에서 비롯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고조선이 유물의 발굴로 실제의 나라로 언급되어짐이 2007년도부터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처럼 역사화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같이 ‘역사화’함에 있어서의 고고학적인 개념의 증거의 돌들이 천사의 주관하에 두도록 하심으로, 발견으로부터의 비로소 권위를 가지지 못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천사가 내려왔다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어떤 다른 일들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개입적인 섭리라고 하심의 주권적 역사를 분명히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힘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주의 정하신 주의 구속하심을 위해 그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러한 천사의 모습의 형상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천사의 그 옷이 번개와 같고 흰 것은 후자의 군대들의 모습이고, 또한 주의 믿음의 성도들의 승리의 따름까지 포함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전자에서는, 구속받은 자들이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음에 있어서 이 천사의 등장은 주의 구속하심에 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의 구속하심을 이루셨음에 대한 것을 현실에 선포하시며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어 본문에서는, 천사들이 하는 말은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서 주님을 뵈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6절, 7절)
사실, 자세히 볼 수 있는 지금의 우리 성도와 다른 입장의 이 여인들에게는 이 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하셨던 말씀, 즉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을 말하고 있음에서 읽게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주님께서 이 여인들을 만나시고 경배를 받으시고 ‘갈릴리로 가서 주님 자신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허깨비를 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천사 그들은 주님이 보내셨음에 대한 것을 의식하게 하시며 동일한 말씀으로 그들의 행할 바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2. ‘무덤을 지키는 자와 여자들’
무덤을 ‘지키던 자들’
그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앞서 언급한 천사의 나타남에 대하여서, 순식간에 깨닫게 되는 것이 그 자신에게는 저주와 심판이라는 것을 보고 무서워 떨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은 사람임을 나타내고 만 것입니다.
인간적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개입과 자신들과 다른 그 여자들과의 관계를 볼 때에, 자신들에게는, 그들과 다른, 준비된 믿음과 신앙이 없는 것을 볼 때에, 아차...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죄악에 대한 판단이구나, ‘죽었다’. 그 당혹감은 참담했던 것입니다.
여자들 저들은 다 믿어 천사의 말을 받고 그들이 기뻐하는데, 나는 뭐인가? 당혹감,
예수님의 죽었음과 부활이 없다는 것을 기정 역사적 사실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이 정죄됨에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참담함의 증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자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흗날이 되는 안식이 지난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보려고 갔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호기심보다는 주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있어서 마음을 두고 있는 가운데서 마음에 인도하심을 받아 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가봐야겠다는 중심이 있었고 이것은 즉흥적인 것보다는 준비하게하심과 함께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이들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 16:1–2)
주님을 경배하는 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마음에 두며, 생활에 실천하려고 하는 그들의 중심이 주 앞에서 부름의 은혜 입은 자임을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그들은 향품을 준비했습니다.
당시에는 십자가 처형은 그 죽은 자는 버려진 가운데서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하는 그야말로 죽음 이후에 처참한 버림으로, 저주받은 자라고 함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신 21:23)라고 함은 일상적 인식으로서 나타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킴이’로서 또 죽으심에 대한 존경적 표현으로서 향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기대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냄새를 지울 수도 있는 그런 물품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심에 대한 것을 받고자 하는 중심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9절과 10절에서 보면, 참으로 이 여인들이 주님을 만난 것을 보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녀들의 주님을 만나 뵘은, 다른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서, 주님을 만남을 인해,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관적인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 말씀의 표현은, 오늘날 우리 성도가 주관적인 측면에서 주님을 만난 것 같은 형식에서도, 실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약속하신 그 시점 주님 언약하신 ‘다시 오심’에서 공식적으로 또한 만나 뵐 것을 비교하여 읽을 수 있게 하심을 받습니다. (즉 주님과의 만남이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개념의 실제적 의미를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인간의 역사적 개념에서 비로소 판단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 즉 시간과 공간의 개념의 판단의 범주와 다른 곳에서, 영원에서, 전능자의 정하심(엡 1:4~7)에서 따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 속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그림자로서의 읽을 고고학적 개념으로서의 역사적 반발로서 당위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그 다할 수 없는 심판의 당혹감에 그 무덤을 지키는 자의 비애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이미 주관적 개념으로 판단되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실제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다시 오시리라 하신, 그 갈릴리의 약속의 장소와 같이, 약속하신 그대로 오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만남의 증거를 주님 예수님의 부활하심에서 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부활하신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서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절대의 재가가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며 주의 뜻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의 먼 일로만이 아니라, 주관이라는 우리의 삶의 가장 가까운 나의 중심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주님 오시는 그날에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주의 말씀하심에 따라 주의 부활의 의미와 증거와 능력을 따라, 주님을 믿고 만난 자들로서 기쁘게 행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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