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한양떼 교회, 2021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눅 2:8~14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오늘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등기하거나 열람 또는 발부받는 것이 참 편리해졌습니다. 옛날에는 호적등본 같은 것은 그 본적지에 직접 가서 열람 가능하고 사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더 실감이 납니다.
오늘 본문의 앞쪽 내용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하는 가운데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기에 베들레헴 다윗의 동네로 가게 되었는데, 많이 힘들었던 것으로 봅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같이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아기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해산하여 머물 여관도 없고 그 첫아들을 강보에 싸서 말구유에 뉘었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때에 그 지역에 목자들에게 천사들의 증거가 있었는데 그 증거의 내용을 살펴보며 구주 예수 나심에 대한 증거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는데 주의 사자가 서고 영광이 나타나며 천사의 소식이 있게 되는데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그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말하며 강보의 싸인 아기가 그 표적이라고 함을 말하고 이어 홀연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찬송과 그 내용으로서 ‘지극히 놓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 두 소주제 1. ‘다윗의 동네에’, 2. ‘구주가 나셨으니’란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다윗의 동네에’
이 ‘다윗의 동네’는 선지자 미가가 예언한 것과 같이 베들레헴을 가리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미 5:2~3)
그러면서도 ‘호적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감’(눅 2:3)과 구체적으로 ‘다윗의 집 족속’(눅 2:4)에 대한 언급을 주목할 때에 혈통적 개념으로서 다윗의 집(사 7:13)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말씀의 문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구약에 이사야의 예언도 같이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친앗수르 세력으로서의 유다를 정복하려고 하는 가운데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있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사야가 주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징조로서의 예언한 말씀입니다.(사 7:2~3, 14)
처녀가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예언이 다윗의 집에 주는 징조 징표로서 예언되었는데, 천사들의 증거에서 주목하는 것이 그 표적 표징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언과 그 성취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심을 봅니다.
2. ‘구주가 나셨으니’
앞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오늘 본문을 예언한 이사야의 예언은 정치적인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릇되게 해석해서 사회정치적 개념에서 약자라는 계층의 권익을 위한 자로서 이해하는 사회복음주의적 개념이 가능한데, 그 가능성만으로 정당함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구약적 표현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로서 읽을 수 있는 것은 9절 말씀에서 ‘주의 사자’라고 표현함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나타내는 경향을 나타내는 또는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서의 구약적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더욱 이샤아기 징조를 말함과 같이 본문 12절에서는 표적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상황뿐만 아니라, 인식적 특성까지도 본문에서는 다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빌 3:5~6) 사도 바울은 그것을, 즉 ‘구원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택하심에 대한 것을’(엡 1:4~5)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 전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창세전에 예정이라고 함에 있어서, 역사의 경험이라는 개념에서 발생되는 상황이나 징조라고 함은 비로소 기준 개념이 아니라 그 예정하심에서의 나타남의 한 요소들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언어로서 ‘예정’이란 말이 창세 전 즉 영원의 속성에서의 구별되어진 언어였음을 말할 때에는 상식적 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하심’ ‘택하심’의 개념과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이란 언어의 ‘단어적 상대적 인식모순’만으로 비로소 상상의 날개로 어지럽게 하는 자는 속이는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나타난 천사들의 찬송에서 읽게 되는 중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구절에서 ‘기뻐하신’이란 말은 ‘유도키아, 유도키아스’라는 말로서 ‘기쁨’, ‘선한 의지’, ‘선택’(choice)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택하사’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등 이 모든 표현들이 한 마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기뻐하신‘(유도키아스)의 뜻의 나열적 설명적 표현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독창적 자기표현과 신학을 가진 것이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또는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설명적 충실성을 나타내고 예수의 자기 계시적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윤리적 개념은 예수의 윤리적 개념의 충실한 해석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주가 나셨음에 대한 것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 구원의 뜻하심인데, 이 말 많고 정치적이고 상황적인 상황 속에서도 온전히 나타내셨고, 나타나신다는 말씀에서 주의 구주이심에 신실성과 감사가 있어, 상황에 따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들의 찬송에서 구주 나심의 내용적 증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천사들의 찬송과 전한 것은, 우리의 어떻게 구주를 믿고 행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사들의 전한 율법을 말한 스데반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3)
유대인들의 상황적 인식적 개념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이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심과 예수님의 메시아로 오심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기뻐하신 자들 중에 평화’라고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것이 구주 나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호적하기 위해 본향으로 향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보면서, 그것이 천사들의 증거로서 구주 나심에 대한 증거와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들로서 구원에 이르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본향인 천국을 향하는 일에 있어서 여러 어려움이라고 함도 기쁘게 감수할 수 있는 자리를 사모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들로서, 감당할 수 있도록 구주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하심의 은혜가,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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