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예언
한양떼 교회, 2021년 12월 1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사 7:10~17
임마누엘 예언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을 성탄절 그리스마스라고 부르고 또 그 날을 기념합니다. 이 날은 한 개인의 생일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가 나신 일이어서 주의 택한 백성들 그리고 주의 지으신 자들 모든 인류에게 귀한 기쁨의 날입니다.
우리는 서방의 전통을 따라서 보통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 성탄절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는 또 다른 날을 말하고 있고, 정확히 언제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때쯤’에 태어나셨을 것이라는 때를 기념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한 날을 정해서 생신축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때, 시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게는 12월 초부터 심지어 1월 초까지 기간을 마음에 두고 기뻐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주일이어서 성탄에 대한 예언과 성취에 대하여서 살펴보며 말씀 증거와 또한 은혜의 자리에 서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10절에서 12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 17절 말씀에서는 이사야가 다윗의 집 너희에게 친히 징조를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과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이 임하게 될 것인데 앗수르 왕이 오는 날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2. ‘이 아이의 때에’ 두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본문의 말씀의 배경을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 그는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정치적 입장은 앗수르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과 다른 지역들은 아람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해서 유다에 대항하려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치상황에서 아하스는 군데를 이끌고 ‘세탁자의 큰 밭길’(사 7:3)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곳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밖에 샘이 있는데 예루살렘 성 안으로 연결된 샘입니다. 그곳에서 세탁도 하고 전투할 때에는 물도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사 7:3)
가서 아람인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 즉 북쪽 이스라엘 왕 ‘베가’,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과 그들의 실상을 그렇게 지적했습니다.
이어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니까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식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증조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히브리적인 기본적인 신앙의 중심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믿음을 보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인데,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징조를 보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것을 보이심으로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예언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 말에서 처녀라고 할 때에, 그 어떤 처녀를 말하는지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지칭할 수 있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로서 결혼하지 않는 여자를 말할 수도 있는 가운데서 불필요하게 논란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처녀라고 하는 말은 ‘알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앞서 말한 두 가지 경우 다 쓰여질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자 지도자로서 레위 지파 모세의 누이도 결혼하지 않는 가운데서 처녀 ‘알마’(출 2:8)라는 말로 사용되어졌고, 창세기 24장에서는 리브가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리브가는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였음(창 24:16)을 기억할 때에, 성적인 관계가 없는 처녀를 나타내는 실질적인 용어로 사용될 수 있고 이 용어를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도 팔데노스(처녀를 의미함)로 번역하고 있을 것을 볼 때에 논란은 의미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적 개념의 구별적 선택에 따른 것으로서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측면이 자연적 측면을 합당히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신성 가운데 인성적 탄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여인의 후손으로서 오심의 성격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 아이의 때에’
여기서 ‘이 아이’는 바로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 아이의 때, 즉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이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인성 가운데서 사람들과 같이 성장하시는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보면 이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라고 말할 때에, ‘이 아이’는 이사야 시대에 태어나는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답변부터 말한다면 아닙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어떤 이는 이사아의 아들 ‘스알야숩’이라고도 하는데, 문맥상 지사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가능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엉긴 젖을 먹는 때’라고 할 때는 보통 3살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또 선지자가 낳은 둘째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사 8:3~4)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16절에 나타나는 임마누엘로서의 아이는 아닙니다. 다만 같은 시대적 표적이 될 수는 있어도, 16절 메시아로서의 예언에서 표현된 ‘이 아이’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은 16절에 나타나는 메시아로서의 ‘이 아이’는 예수님이시고 그의 존재적 이름의 호칭처럼 백성들과 함께 하심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오시면서도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 속 탄생은 하시지 않으시면서도 그 아기의 때와 같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정시기 즉 3년 정도의 시간 후에 두 왕 즉 르신과 베가가 죽임을 당하고 그의 나라가 황무하게 된다고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앗수르 왕이 오는 때에 징조로 표현되는 것은 죄악으로 멸망당하게 되는 가운데서의 구원자 메시아의 입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개념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로서의 신성적 개념이기 때문에 창세 전 정하심의 따른 자기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를 오게 하시는(사 43:7) 영적인 실재론적인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의 집이여,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사 7:13,14)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면서, 조금 이해됨에 있어서 어려운 것들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에 대한 것, 여인의 후손으로 오심에 있어서의 그 신성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에 대한 이어지는 예언 등에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오심에 대한 것이 이루어진 시대를 살면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생활하는 복된 삶이 되기 바랍니다.
더욱 이 말도 많고 차가운 세상에서 삶을 위한 변명에 많이 힘들어하는 때에라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심은 그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주께서 지금과 내세의 소망으로 함께하십니다. 이 예언하신 주의 구원을 증거하여서 많은 자들이 옳은 데로 돌아오는, 구원의 자리에 서게 하시는, 올해 성탄을 지내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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