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청지기

한양떼 교회, 2022116, 주일 오전 예배 설교

12:41~48

진실한 청지기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분노하며 읽은 기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아주 간교하게 조롱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며, 정말 화가 많이 나서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중심으로 흔들릴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 15:30),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면서...’(27:42)라는 말들에, 예수님이시니 감당하셨지,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들음에, ‘너 죽고, 나 죽는다고 대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게 행하면 그 십자가를 지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의분(義憤)’이라는 것에 매이게 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기 힘들어질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 예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주의 신실하심에 따라 주의 은혜를 제자들에게 베풀어 주심을 믿습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41절 베드로의 질문과 42절에서 48절까지의 예수님의 답변하심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하심에서는 42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에 대하여서 묘사하고 그 종이 복이 있어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맡기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45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렇지 못한 종의 중심과 행위가 있어, 주인이 이르러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할 것인데, 그 벌의 내용과 형편이 어떠한지에 대한 언급을 하시고 있습니다.

 

1. ‘양식을 나누어줄 자 누구냐’, 2. ‘생각하지 않은 날’, 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합니다.

 

 

1. ‘양식을 나누어줄 자 누구냐’,

 

이 예수님의 반문에서 읽게 되는 것은, 바로, ‘베드로 너가 아니냐라는 의미를 받게 하심을 봅니다. 사본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누구라는 말(τίς, 티스, who[pronoun interrogative])라는 말은 액센트가 있는 말로서, 아주 강조되어진 말입니다. (만일 액센트가 없다면,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질문하고 있음에 대하여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누구냐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심에서, 느끼게 하심은 베드로 너가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면, 베드로가 그 뜻하신 바로서 베드로 자신을 주목하는 말씀으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후의 베드로의 모습을 아시면서도 베드로가 감당할 자로서 신실성을 감당할 자로 받을 수 있도록, 깨닫도록 말씀하심을 봅니다.

 

그를 볼 때, 베드로 자신의 모습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자임은 오랫동안 자신만의 고민이 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가 어떻게 순종할 지에 대한 것도 일러주심(21:18~19)에서 베드로의 고심을 위로하심으로 볼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여러 가지로 불편했었을 것으로 봅니다.

 

베드로는 결혼 한 자로서,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고민도 했고, 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것으로도 보이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정도로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판단과 정열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분(義憤)도 상당한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잡히실 때에, 종 말고의 귀를 벤 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18:10),

 

상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적으로 열심 있는 열심당원 시몬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신구약 중간기 이후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권력을 얻어 나라를 회복하고 헬레니즘에 동화되어서 그들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입장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접근한 열심당원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가 맹목적인 자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이 잡히심에 가장 분노할 수 있는 입장이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입장은 상당히 불안한 입장이었고 그의 삶의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18:26)에게 베드로의 정체가 발각되어서 주님을 부인해야 하는 입장에 봉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도 예정하심에서 알고 계시면서, ‘베드로 너가 아니냐라는 것의 반문으로 베드로를 진실한 청지기로서 복된 종으로서 정체성을 가지도록 의식을 깨우치심을 봅니다.

 

이전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답변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7~68)

 

이 장면에서 그 때에 비로소 베드로를 제자로 정하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의 창세 전에 예정하신 뜻하심 안에서(1:4), 그 정한 때, 그 역사적 시점에 그 열매가 있었음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에 대한 것으로 그 말씀을 받고자 서 있는 자의 모습을 볼 때에, 그런 중심을 가지게 하셨을 때에, 그런 의식을 베드로가 가질 수 있게, 반문하심으로 보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는 주의 반문의 말씀입니다.

 

 

2. ‘생각하지 않은 날

 

둘째 단락은, 첫 단락에 대한 반론적 개념에서, 보충적인 측면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말씀 자체의 종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하는 바의 상관성에서 그 내용적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 앞선 43절 말씀 복이 있는 종에 대한 반대를 상정하는 내용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제인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은 같은 의미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은혜를 입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베드로와 같이 그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도록 하심의 주의 은혜 베푸심을 받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로서의 그러한 때, 구체적인 그 때로서의 시각이 주의 심판의 때라고 함을 말씀하십니다.

 

45절에 나타나고 있는, 종의 마음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함과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함은 사실 배경에서 볼 때에 유대인을 비롯한 그 함께 한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라고 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중심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셨다고 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원하지 않았고 또한 상황적으로 기득권적으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예수님을 인식하였고 그 정치적 개념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원했던 것입니다.(14:11) 그리고 돈을 많이 주고 사람들을 매수하였던 것(28:12)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쳤으며(7:59~60), 사도 바울을 돌로 치게 되는 것(14:19)으로 자신들의 가르침의 기득권을 위하며 지키려 할 것에 대한 것도 사실과 예언으로써, 이미 기정사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알고 준비나 행하지 아니한 자’, ‘알지 못하고 맞을 행한 자모두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벌에 처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한 주님의 비유에서 악한 종인 한 달란트를 받은 자의 중심이 그러했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 종들에게 맞게 정당하게 달란트를 부여했음에 대한 것을,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으로 그 달란트의 적음을 인해 일하기를 거부한 자의 모습이며 또한 은행 이자를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지 않은 자의 모습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25:24~30 참고)

 

 

주의 영생의 말씀을 사모하고 따르는 자들로서, 행하는 자로서 주의 신실하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말씀으로 받게 됩니다.

 

비록, 나의 모습이 주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서 더디고, 말씀을 받은 자로서 그 뜻을 행함에, 참 고민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낙심과 고민이 있을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신실하심으로 진실한 종으로서 복된 종으로서 우리 성도를 세우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때도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의 영생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며 그 앞에 서고자 노력하는 자들로서 주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임을 받습니다. 주의 생명의 양식인 이 복음의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때를 따라 증거하면, 때로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은혜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그런 주의 말씀 앞에 선 나, 우리의 모습에서, 형편과 어려움 속에도 주께서 주시는 은혜로, 베드로처럼 깨어나서, 주의 뜻을 잘 받드는 진실한 청지기, 그 종의 복을 받게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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