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한양떼 교회, 2022313, 주일 오전 예배 설교

13: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나, 삶을 살아갈 때도 저마다 다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 기준 중 하나가 하나의 보편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란 것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넓은 길을 놔두고 꼭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 선함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경우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선함을 말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경우의 생각들도 사실은 크신 하나님’(95:3,2:13)에 대한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서 그 기준을 삼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95: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2:13)

 

그 크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이라고 함은 상대적인 판단을 받는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주 예수님의 말씀에 한마디 거드는 듯한 알지 못하는 문안을 하는 것으로 봅니다.

 

주님께서 힘쓰라고 하신 말씀과 그에 대한 말씀하심에 우리는 성도로서 순종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2절에서 23절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까라고 질문한 내용입니다.

 

24절에서 30절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면서 집주인이 문을 닫게 되는 날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받을 형편이 어떤 것인지, 쫓겨난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에 대한 것과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을 것과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바뀜도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좁은 문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정확한 입장과 상관 없이, 이 사람의 말이 판단을 받을 수 있음을 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의 말씀하심의 정황에서 그의 말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그 구원받은 자의 수에 대하여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전제되어진, 이미 질문하는 자나 주님 모두 알고 있고, 그런 가운데서 건네고 있는 말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더욱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이 말씀하심을 보면, 본문의 어떤 사람이 마음에 두고 그 적음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고, ‘구원받는 자라는 것에 적음도 그러한 가르침의 입장에서 판단받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문맥이 이후에 비교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7:21~23)

 

일반적으로 크신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의식하고 있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함은 그 표적으로서 크고 넓어야 하는 것으로 설득력 있게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런 것이 보이지 않고, 구원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럼 구원받는 자도 적다는 뜻인가, 그럼 크신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2. ‘좁은 문

 

이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사회적 정치적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사회적으로 대제사장들의 결례와 의식에 있어서 존경을 받는 그런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그런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오셔서 그 주님이 걸으시고 열어놓으신 가르침이 아주 작은 문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 유대인의 기득권적 세력에 비할 바는 아니면서도, 그 무리들의 수에서는 적지 않은 자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 있어서도, 그 관심과 일상적 예의와 도의적 개념의 관계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그와 관계를 가진 자들을 모른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행한 관계와 면식과 달리, 주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말씀하신 좁은 문에 들어가기에 힘쓰는 것과 관련이 있고 그것을 위해 전제되어질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을 안다고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감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데, 내치심에 이유는 무엇일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는데,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읽고자 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서에 같은 정황으로 읽을 수 있는 말씀으로서 보면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진정 주님으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의 모습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대로 대답하겠다고 모압 귀족들이 함께 유숙하게 했습니다.(22: 8) 나귀의 입을 열어서 말하게 하시고 천사가 막았음에도, 그는 이익을 위해 세 번이나 저주하려고 하다가 결국 축복하고 그는 자기 길을 가다가 이스라엘과 상관 없는 자로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발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또 따르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상황에 따라서 그랬을 뿐이거니와 하나님을 주로 부르기는 했으나,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체험이 있고, 만난 체험이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권세를 자기의 유익을 위하고 충족하고자 했던, 더욱 그것으로 주의 백성을 저주하는 분별없는 행동을 하는 자의 모습이 불법인 것입니다. 주님이 복을 주셔서 복이 되라’(12:2)고 하신 민족을 저주하려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주로 부르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수 있는데, 진정 주님으로 부르면서 그로부터의 존재와 행함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을 동행하는 자였음은, 그런 자가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크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할 때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 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크신바와 같이 행해줄 것을 요구할 권한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처럼 건방지고 일상적 정황적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든 그 말씀하심이 재가가 있다는 측면에서 상대적인 모습의 판단을 넘어 순종하는 것이 크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자의 바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메시아로 오심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언약을 연구했던 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그런 의식을 통해서 다시 다른 메시아가 올 수 있다는 기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채우고자 하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도 기적을 보면서도 함께하면서도, 그 좁은 문에 들어가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리에 서지 못하는 자로서 주의 뜻을 저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양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가운데서 더욱 힘쓰는 것은 도의적으로 예를 갖춘 주님을 부르며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통치자로서, 주님께서 행하심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 비록 우리의 삶에 작음으로서의 가치적 개념이 적다는 판단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뜻하심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중심임을 마음에 둡니다.

 

이런 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증거했던 것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1:18)

 

여기서 근본이란 말은 아르케란 말인데,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그 근본 아르케일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지으신 통치자(magistrate)이심을 믿고 주님으로서 동행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2:6~7)

 

이와 같이,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심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이용하는, 마음에 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자로서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안에서 정당함을 찾고 행하도록 하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주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심의 기본적인 중심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중심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라고 하심에 순종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전에 성경을 읽어보기도 하고, 교회에 나아서 신앙생활도 해보고,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께 기도도 해봤다고 하는 또는 여러 체험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관계성이란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선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 귀한 것이고 본래적인 것임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모심에 대한 것을 바르게 마음에 두고 행하는 것, 그것이 주의 말씀에 따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는 것임을 마음에 두면서, 순종하시는 가운데, 주 예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케 하심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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