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한양떼 교회, 2022327, 주일 오전 예배 설교

10:22~3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로서 주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전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만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더 나아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입장은 합리적인 경우만 생각하면 서로 이해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는 연결되어질 수 있고 믿음의 합리성은 공감되어지는 당연한 진리로 나타납니다.

 

가장 애매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열심 있으면서도 지나치기 쉽고 그래서 잘못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 중 하나입니다. 또한 그에 나타나는 열심 있는 신앙의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말씀대로 삶을 경영하려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들과 다른 중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심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변론으로, 돌로 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인식에 맞게 표현하시며, 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하시고 주님을 잡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나 나가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아래의 주제에 따라 증거하겠습니다.

1. 유대인적인 히브리어적인 문화와 문법적 개념과 인식을 이해

2.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1. 유대인적인 히브리어적인 문화와 문법적 개념과 인식을 이해하고 본문을 이해함이 중요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본문의 문장과 문맥이 그와 같은 전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언어에 있어서 동사를 먼저 말하는 것으로서 행함에 대한 표적을 구하는 인식을 기본으로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수전절로서 때는 겨울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전절에 대해서

 

수전절은 봉헌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기원전 168년에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4(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유대 전역을 헬라화 하고자 하는 작업으로 유대인들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 율법에 금기되어진 돼지를 제물을 바치게 하는 일을 강행하였는데, 기원전 165년에 마카비 일가가 혁명을 일으켜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였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된 절기입니다.

 

그래서 여러 전설도 있고, 기적도 있는 그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곳에 있던 등불을 켤 기름이 하루 정도의 양이었는데, 8일 동안 꺼지지 않고 불을 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빛의 절기라는 표현도 쓰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신성적 의미를 갖춘 그 때였습니다.

 

이 절기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각기 있는 곳에서 절기를 지낼 수 있습니다만 예루살렘에서 지키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름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 있는 자들로서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겨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겨울은, 지중해와 대륙의 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춥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겨울이 비가 오는 계절입니다. 즉 그만큼 춥지는 않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작과 같은 농사를 위한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때에 오심은 말씀의 씨앗을 받을 수 있는 시기로서 보여지며 이러한 때에 종말의 때에 깨어 있어야 할 때를 의식하도록 하심으로 봅니다.

 

즉 이런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4:20)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마치, 산으로나 피해야 할 때가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기를 겨울에 일어나지 않기를 구하라고 하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내와 같이 농사일이나 여러 돌아봐야 할 일들이 있을 수 있고 율법의 열심히 자신들을 삼킴에 희생되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신 예수님께서 구주로 오셨는데, 그 유대인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함이 돌을 들어, 하나님이심에 따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려는 악함에 처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를 감하여 주시는 가운데서, 이후에 주의 행하심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는 37절에서 38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주님께서 행하거든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심에서 그 행함을 믿는 가운데서 그들의 인식의 전제로서 예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유대인들의 특성을 이해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의식 구조에서는 믿음보다도 행함과 또한 표적이라고 함을 내세우는 것으로 믿는 것에 다소 늦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심이 겨울이라는 시기를 언급하시는 것으로 읽게 됩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존재보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먼저 증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대화를 이끄시는 주님의 표현에서도 읽게 되며 이 절기를 말씀하심도 그와 같이 읽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지적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이라고 하셨음에 대한 지적도 히브리적 개념에서 보면, 그 말씀을 받는다는 행위적 개념에서 존재로서 신이라는 존재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은 신 자체라기보다는 신의 존재의 행함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통념적인 것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보내심이라는 개념은 그 정당함을 찾을 때에 당연한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 본문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0)라는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36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10:36)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창세 전’(1:4; 벧전 1:20)에서 언급되어진 현실 속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 이후에 생겨난 언어의 한계와 인식의 한계는, 영원에서 존재하는 또는 차용된 언어로서의 보내심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범주가 다른 것의 비교적 개념을 강요할 수 있는 당위성을 비로소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한 비판과 질문과 그로 인한 답변의 요구도 기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억할 것은, 우리의 통치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 근본이심(1:18)에 있어서 그 정당함은 주님께 있음을 인해서, 우리의 일상적 언어표현 아들을 보내심이란 말의 표현은 성립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근본이란 말은 아르케로서 통치자라는 말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롯되어진, 창조되어진 시간과 시간 속에 영원의 현실적 표현은 주재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의 현실적 표현이 앞서 언급한 30절의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두 인격체이시면서 한 인격체이시며 이는 생성적 개념이 아닌 본래적 표현입니다. 즉 삼위 일체적 자기 계시의 한 표현입니다.

 

참고 읽기 1

(‘하나이다라고 할 때에 말은 헬라어 본문에선 헨 에스멘입니다. 일인칭 복수로서의 이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NASB에서는 ‘a unity’, ‘one essenc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약 사전(TDNT)에서는 ‘single’, ‘unique’, ‘one of two or may’, ‘only one’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niv역에서는 관주로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과 같이’(17:21~23 참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본문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연합된 성격만 생각하면 역할론이 가능합니다.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본질이라는 말을 쉽게 생각하면 종속론과 그에 따른 열등론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즉 옛날 양태론이라든지 종속론이라든지 이단들이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니케아 회의콘스탄티노플에서 결국, 혼합되지도 않고, 나눌 수도 없는 가운데서의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를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임의적 고안을 정치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을 채택한 것입니다.)

 

(두 명, 세 명도 아니고, 한 명의 표현도 아닌 가운데서 위격적 표현이 요구되었고, 하나임에 대한 것을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분별없이 삼신적 개념으로 쉽게 말하거나 한 사람의 다중적 역할로 말하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위격과 일체를 말씀하심으로 받습니다.)

 

 

참고 읽기 2

3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8)

 

일체란 말은 증명적 방법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하심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이란 표현이 그것입니다.

 

(수학적인 측면에서 합동’, ‘동일이란 집합적 개념의 증명은 어느 한 쪽의 임의적 개체 하나를 선택해도 다른 한쪽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상정한 두 집합의 입장에서 행할 수 있을 때에 동일하다는 것을, 하나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표적 논리를 내세우는 유대인의 입장에 대해 그 일체를 의식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를 말하면서 일체를 말하기를 꺼려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간혹 있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임의적으로 꾸며낸 것으로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단정 짓는 분들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앞서 참고로 말씀드린 문장에서의 사전적 측면의 언어 접근에서도 두 인격이면서도 한 인격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수 이면서도 하나로서의 해석적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38절에서는 일체로서의 한 분임을 읽도록 말씀하심을 봅니다.)

(일체를 분명하게 지적하심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은 위격의 일체를 나타내십니다. 이는 말로써 모든 부분을 표현하거나 기술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기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 믿음의 이유에 대한 정도로 기술하는데, 모든 기술(記述)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성급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면 잘못되게 나타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는 아버지, 밖에 나가서는 같은 사람이 사장이라는 표현과 같은 일인이 다중적 역할을 한다는 역할론이라든지, 여럿인데 한 명으로 말하려고 하니 종속설이나 열등한 존재로서 표현하는 것이 현대와 또 옛 이단들의 특징이고 앞으로도 그런 것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정당함을 따라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심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충족성을 다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씀의 그 표현의 정당함과 그에 따른 충족성을 말하는 것이, 믿음의 분량 안에서 우리가 취할 바임을 기억하고 또한 증거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완벽한 기술을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을 겸손하게 하시고 주님 뵈올 소망으로 기뻐하게 하심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말씀을 맺습니다.

 

현대는 합리성을 너무 맹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떤 것의 합리적 전체성에 비로소 의미를 두려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도 간혹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갓난 어린 아이들이 아빠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이가 “‘아빠를 안다라고 합니다. 비록 아이는 아빠의 나이 직업 그리고 앞으로의 삶의 계획함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의 판단의 당위성을 벗어나서, 성경에 따라 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게 주님으로 모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주님 안에서 내 존재와 삶의 당위성을 찾는 자리에 서는 자로서 구원의 길 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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