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한양떼 교회, 2022년 1월 3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막 4:1~20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소년 시절에, 공부할 때, 특히 시험문제풀이를 할 때에, 문제와 답을 보고 문제풀이 연습을 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어떤 수학문제는 아니지만, 비유와 비유 설명이 같이 나타나는 말씀을 대하면서, 맞춰보면서 말씀을 살펴보게 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표준 기출 문제와 같이 본문의 비유를 알지 못한다면 다른 비유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은 본문 비유의 말씀과 그 설명을 맞춰 살펴보는 열심을 갖게 하십니다.
즉, 네 가지 땅과 그곳에 떨어진 씨의 성장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마음 밭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곳에 말씀을 받게 될 때에 있게 되는 현상들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어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는데 이에 여러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는데,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에 씨가 떨어짐을 말씀하시고 각각의 그 결과들에 대하여서 또한 말씀하십니다.
본문 10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에 대하여 물으니, 주께서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비유로 함을 말씀하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시고 비유의 중요성 즉 이 비유를 알지 못할 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는 말씀과 함께 비유에 대헌 설명을 하십니다.
앞서 서론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말씀을 받는 ‘마음 밭’에 대한 것으로서, 이에 언급된 네 가지 밭에 대하여서 두 단락에서 언급되어짐을 비교하여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길가
(4절 말씀과 14~15절 말씀)
‘길가’라는 것은 ‘길의 곁. 길의 양쪽 옆. 노변(路邊)’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밭의 형식은 아니지만, 씨가 뿌려진다는 점에서 특히 밭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적합한 표현으로 차용되어진 표현입니다.
씨가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음과 그 설명하심은 새로 비유된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빼앗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의 마음 중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7~18)
주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심인데, 그 교훈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주님이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핑계치 못할 복음인데 그것을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드다’나 ‘갈릴리의 유다’와 같은 임의적 가르침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고 주의 사도들의 가르침도 버려두기를 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행 5:36~41)
이처럼 주의 말씀을 자신과는 다른, 자신의 밭과는 상관이 없는, ‘타자(他者)화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사도들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그 유대인들의 모습은 이미 말씀을 받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이미 사탄의 역사의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을 말씀입니다.
2. 돌밭
(5~6절 말씀과 16~17절 말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싹이 곧 나오지만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설명에서는 즉시 기쁨으로 받음과 뿌리가 없음이 지적되면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지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경작에 비교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돌밭도 경작하여 좋은 밭이 되도록 할 수 있는데,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나 그러한 초기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고층건물을 신축하려고 할 때에, 그 공법에 따라서 그 높이에 대한 지하의 깊이를 결정하여서 지하 공사를 먼저 하게 됩니다. 아마도 고충건물일수록 지하의 깊이도 깊어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좀더 그런 인식의 근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뿌리 깊은 나무’라는 라고 할 수 있는 그 뿌리의 중요성을 말씀하심은 땅의 ‘돌’이라고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아야 하는 또는 제거할 수 있는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한 그것의 ‘여전히 있음’의 마음 밭의 명칭인 ‘돌밭’이 주는 것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마음에 두게 하심입니다.
주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고 그 말씀을 따른 신앙의 믿음의 삶이 있어야 함을 의식하게 하심과 그것이 없는 자의 화에 대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예를 든다면, ‘헤롯 안디바’(막 6:19~29)의 경우가 될 수 있겠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고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왕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경우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그는, 요한을 죽임에 내어주고 말았음을 봅니다.
3. 가시떨기
(7절 말씀과 18절과 19절 말씀)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에 대한 것은 그 해석으로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19절의 말씀에서 표현하심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가시’라는 것은 가시떨기와 같이 복수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어떤 가시나무 군집 또는 가시나무 한 성체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염려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한 사실이 아니라 그 염려로 인해 어떤 하나의 도그마화 된 신념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을 말할 수 있고 또 재물의 유혹이라고 함도 그 재물과 관련되어진 사건들과 그것에 대한 계산되어진 사상과 입장들 또한 어떤 얻고자 하는 것의 점차적 계획과 같은 것들 이처럼 마음의 여지를 두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탐심이 우상숭배(골 3:5)라고 하심을 말씀하심에서 물질을 하나님과 병행하여 섬길 수 없음(눅 16:13)에 대한 지적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도그마화 되어진 가운데서는 주님의 말씀을 마치 받을 수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20)에서 비교되어집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스스로의 위로의 실제하지 못하는 가능성 자체만 실제로 받고 싶어하는 자들의 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4. 좋은 땅
(8절과 20절 말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8절 말씀에서는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라고 표현하고 있고, 20절 말씀에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땅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포도원 주께서 기르시는 주의 백성의 마음의 중심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순종의 문제가 중요하게 잘 나타나고 있고 또한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의 ‘마음 밭’이 좋은 밭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서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성하다는 말은 원형이 ‘아욱사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현제 수동태 분사입니다. 즉 ’자라게 하심을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실하였으니’라는 말은 ‘디두 카르폰’ 직역하면 ‘열매를 주다, 내놓았으니’, ‘열매를 내놓고 있는, 열매가 달려있는’라는 말입니다.
이것의 중요한 비교적 의미는 ‘마른 무화과나무의 비유’(막 11:13~14)와 비교되는 것에서 더 주목하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잎사귀 위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때부터 영원히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심과 이후에 그 나무가 말랐던 것을 봅니다.(막 11:20)
열매를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무화과 때가 아님의 이유가 있었으나,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이미 생명력을 주시고 자라게 하셨음에 대하여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 잎사귀가 있어 자라게 하심의 은혜가 있었음에 대한 증거와 주님께서 열매를 찾으심에 대한 것은 그 열매를 자라게 하심도 같이 허락하심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순종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유월절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드릴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의 예표적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서 믿지 못한 유대인들은 결코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자들로서 나타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은, 비교할 때, 자라게 하심 ‘아욱사조’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고, 결실하다 즉 ‘열매를 내놓다’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실 때에, 그것이 자라게 하심의 결과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에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시는 ‘좋은 땅’은 주의 말을 듣고 열매를 맺을 때에 그것 모두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음과 그 순종의 열매도 그 결과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중심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땅 좋은 땅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믿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어진 것을 분명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선행적 공로’라는 개념으로 언급된다면, 좋은 땅으로서의 주님의 포도원이 될 수 없음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씨가 뿌려지는 밭의 비유로 표현하심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관심으로 보거나, 타자화(他者化)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유대인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받지 못하는 슬픔과 주의 판단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돌밭이나 가시떨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여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들의 자기 임의적 합리화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판단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서, 때를 얻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열매를 맺는 노력을 할 때에 주의 좋은 땅으로서, 주님의 포도원으로서 받으신 바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주 하나님의 주신 바가 된 것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좋은 땅으로서 경작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의 마음의 형태적 개념으로서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에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좋은 땅으로서의, ‘마음 경영’을 바르게 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교회의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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