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 재앙 – 흑암 재앙

한양떼 교회, 2022년 220, 주일 오전 예배 설교

10:21~29

아홉째 재앙 흑암 재앙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은 눈을 가리고 빛을 보는 노력으로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고를 만나 갇혔던 사람이 구조되었을 때에, 구조자들은 구조한 사람의 눈을 가리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보게 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적응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둠이라고 하는 흑암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 수 없다는 판단까지도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둡게 하셨다는 것과 그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 사고방식이라고 함을 통해서 그 무서움의 의미도 읽게 하시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과연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기로에 놓인 것과 같은 고통이라고 함으로 가히 재앙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그와 달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에서의 깨어 있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심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1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셔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고 하심과 모세의 순종과 흑암이 3일간 애굽 온 땅에 있었는데, 사람이 서로 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로가 모세를 불러, (합의점을 찾고자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함께 데려가고 양과 염소는 머물러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왕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한 마리도 양보하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에 따라 그들을 보내기를 기뻐하지 않고 모세에게 다시 얼굴을 보는 날에 죽을 것을 말하자 모세도 다시는 바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1.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 2.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라이 두 소주제로 말씀을 이어 증거하겠습니다.

 

 

1.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심에는 흑암이라는 것은 죽음을 의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생명이 없는 곳으로 의식되어질 수 있는데 이는 이사야서의 히스기야의 중심과 또한 신약에 요한복음에서 빛의 개념이 비교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12대 혹은 13대왕으로 표현됩니다. 그의 기도와 삶을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병들어 죽게 되었음에 집을 정리하라고 하는 말을 하자, 히스기야는 기도하는 가운데 낫게 됩니다. 그 기도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38:11)

 

산 자의 땅과 비교하여 죽은 자를 의식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5)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빛이 없어, 어둠에 있다고 함, 흑암이라고 함은, 바로 산 자의 땅의 아니라 죽은 자들의 땅에 속한 자들의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애굽 사람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3일이라는 개념도 완전함을 나타낼 수 있는 수이기에, ‘3일 간의 흑암이라고 하는 것은 버려진 자들로서의 생명 없음과 그 죽음 이후에 심판을 느끼기에는 필요충분했던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과 구원으로 임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데, 빛이 비취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 애굽 사람의 현실적 고통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구분의 의미를 통해 구별의 의미를 나타며, 주의 거룩한 백성 즉 성도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2.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에 속한 자로서, 정치적인 측면에서 타협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지 못한,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모세가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노아의 후손, 셈과 함의 후손들로서, 모세와 바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신앙의 뿌리는 혈통적으로 같지만, 이제는 셈을 위한 종으로서의 함의 비애(悲哀)’로서의 절정에 와 있는 모습을 봅니다.

 

모세도 바로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고 같은 애굽의 바로의 자격으로서의 학문에 능통하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학문적으로는 거의 수준적 개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런 혈통과 달리 바로는 정치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하고 있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한 판단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운데서, 실존의 정당성의 시비는 가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내려진 돌림병에서 가축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가운데서 구별되어서 살아남은 것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소유로서, 빛이 없는 어둠에 속한 자로서는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싶으나,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들로서, 이미 기각(棄却)되어진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서의 화목제물을 부정한 자로서 먹는 자들은 자기 백성에게 끓어지리라’(7:20,21 참고)하심을 나타내시는 측면의 재앙에서, 이미 함의 자손 바로의 입장에서는 주의 백성이 아님에 대한 실형이 주어진 상태임을 기억할 때에, 모세의 거절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보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자기 목마름을 위해 심부름을 명해 줄 것을 구했으나 전혀 상관할 수 없음을 말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16:24~26, 27~31 참고)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27절 말씀과 28절 말씀의 상이한 말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즉 바로는 정치적으로 마지막 결단으로 다음에는 모세의 생명을 취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보를 막겠다는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중심을 보이고 있고, 모세는, 바로가 그 실존적으로 부정되어진 자로서, 모세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실제적 모습으로 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둘 다 얼굴을 보지 말라는 말과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의 배경은, ‘산 자의 땅이 아닌, ‘죽은 자의 땅을 의식하는 흑암’, 어둠의 자리, ‘빛이 비추이나 깨닫지 못하는, 흑암에 처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애굽의 바로의 모습을 나타내시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완악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27) 즉 은혜를 입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빛이 비추이나, 외면하고 반복해서 거부하는 가운데서는 완전히 그 빛에 대하여서 시력을 잃게 되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의 모습에 주의 영광의 날에 그를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9:26절 참고) 우리가 주의 말씀을 잘 배우고,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배우고 익히면, 깨닫지 못하는 어둠의 자리가 아니라 산 자의 자리에서 빛 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구원에 자리에 서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히스기야는 그런 산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뵙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입어, 병이 나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강하게 하시며 낳게 하셨는데, 바벨론 사절단에게 자기의 내탕고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자신의 능력 있음에 대한 과시로 인해 책망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39:6~8)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리에 서게 되어, 빛 되신,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함이 일상이 되어서 예수님 오실 때에 전혀 낯설지 않고 밝히 바라보며 기쁘게 맞이하는 자리에 서는 은혜를 사모하며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애굽에 내려진 흑암의 재앙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영접하지 않는 가운데서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예표적 모습을 구약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예수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1:10~12절 참조)

 

빛 되신 예수님을 외면하여서,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자리에 서지 말고, ‘빛 되신 예수님안에서의 삶이 일상이 되어서, 주님 오시는 그날에 전혀 낯설지 않은 주님, ‘빛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것과 같이’, 생명의 주님이 함께 하시며, 예비하신 주님 계신 곳에 있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한양떼 교회와 우리 성도들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다섯째 재앙 – 가축의 죽음